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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의 기상도 규수의 모범도 다 헛된 소리.

태산이 높다 한들 나를 칭송하는 말이겠으며, 세상이 넓다 한들 그것이 모두 내 땅이겠나."

 이주가장檽朱家莊은 오래된 토호이자 관리 집안으로 해당 지방의 이름있는 권력이다. 가장인 이주평檽朱怦은 자식이 없어 내내 후사를 고민하다가 거진 사십이 다 되었을 즈음에 외동딸을 얻는데, 바로 화연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식이자 일가의 유일한 후계자였기에 가문에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대개 무엇이든 들어 주곤 했다. 집안 안팎으로 잘 떠받들어지며, 그리고 좋은 교육들을 받으며 자라난 그녀는 그러나 나이를 먹으며 부부가 바라지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자라나는데.......

 

 점점 공부를 게을리 하고 사사건건 불평과 불만을 구실삼아 주변을 피곤하게 하더니, 십칠 세 때는 예와 무를 가르치는 선생들을 뿌리치고 결국 거리로 나갔다. 이후부터는 동네 건달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 퍼먹고 주먹질하고 시비걸고 다니는 것이 일상. 패거리 사이에서는 집안빨이 있으니 누님 언니 소리 들으며 모셔지는 중이다. 사흘에 한번은 집으로 깽값 청구서가 날아오는데, 하나뿐인 가문의 후계자라 양친은 내놓은 자식이라 할 수도 없고, 합의금을 쥐어주건 사람을 보내 설득하건 혹은 좀더 은밀히 손을 쓰건 하여 분란들을 덮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약점을 알고 본인은 이용해 먹고 있는 것.

 

 타고난 두뇌가 명석하고 주변 상황을 잘 파악하며 성격의 이러한 점들은 때로 교활해 보이기까지도 한다. 고집이 있고 오만하고 제 뜻대로 안 되는 것을 잘 두고보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거의,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 또한 없었다. 정의나 정당성을 곧잘 비웃으며 부러 그에 반하는 일들을 행하곤 한다. 천박함에 거리낌이 없고, 필요하다면 권력에 야합하나, 아부를 잘 하는 성격은 아니다. 거짓말에 죄책감이 적고 본심을 곧잘 감출 수 있지만, 자존심이 강하므로 감정상 아니꼬운 것을 잘 참지는 못한다. 그렇게 참아 본 적도 별로 없고. 만일 화연이 어쩔 수 없이 굽혀줘야만 하는 상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상대방은 그녀의 언행이 전혀 진심에서 비롯하지 않고 있음을 쉽게 눈치챌 것이다. 어쨌든, 외형적으로는 강약약강. 물론 저보다 아래에 있다고 판단하는 자들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화연이 천지 모르는 망나니인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받아 온 교육이 있으므로 권력의 흐름을 알고 세상의 넓음도 안다. 당장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지방을 벗어나면 저의 집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고 귀한 신분들이 도처에 가득하며, 선생을 붙여 배운 제 알량한 무공으로는 넘볼 수도 없는 무림의 고수들이 천지에 많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기에, 화연은 지금의 테두리를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내 발 아래에 있는 데까지, 딱 그까지가 그녀가 원하는 세상이었다.

 

 

 

 

 

 

 처음, 화연의 온갖 비행들이 한때의 엇남이 아니겠는가 하고 두고 보던 화연의 부모였으나, 그녀가 성년이 되고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나도 이놈은 행동거지 하나 고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걱정이 태산 같던 부부는 그리하여 어느날 꾀를 내어, 화연을 따로 불러 놓고 말하였다.

 

 "화연아, 수도엘 다녀오거라."

 "네?"

 

 뜬금없는 이야기였으나 어차피 몇 번을 말해도 곧이들을 리 만무, 화연은 무슨 엉뚱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멀뚱히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거리가 멀기는 하나 길이 잘 닦여 있고 내륙이니 크게 고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서, 중앙의 여러 명망 있는 가문과 사람들을 만나보고 인사를 나누고 오거라. 우리 집안이 지방의 권세이기는 하나, 언제든 나라의 중심과 교분을 쌓아 두어 나쁠 것이 없지. 너는 이주가장의 외동딸이니, 신분을 밝힌다면 그쪽에서도 합당히 예로 맞을 것이다."

 

 "아이구, 어머니는 말씀을 거두시지요. 이 화연이는 무능하고 끈기가 없어 그런 대업을 해낼 각오가 없습니다. 수도라니 그 무슨 말이더이까? 저는 됐습니다."

 

 화연은 손을 내저었다. 부모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이것이라는 것을 알자 귀찮고 불편하여, 벌써부터 자리를 뜨고 싶어졌다. 화연의 모친 윤우선尹優宣은 마치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이어서 말했다.

 

 "노자는 은과 동전으로 준비해 두었다. 여행길에 너무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화를 부르지. 가는 길 중간중간에 큰 도시를 들르거나, 수도에 당도했을 때에 표국으로 가라. 이름과 신분을 밝히고 이 패를 보여주면 맡겨 놓은 금전과 물건을 찾을 수 있을 것이야. 몇 가지는 대가에 가져갈 예물이다. 혹은 항구에서 들어오는 갖가지 진귀한 상품들을 네가 직접 살펴보고 사도 좋으리라. 패를 보이면서 거기서 이리 물을 것인데......."

 

 우선은 옆에 놓여 있던 작은 패를 화연에게 건네며 설명했다. 그것은 잘 말린 향나무에 음각으로 글을 새기고, 테두리를 따라서는 자개로 장식했으며 붉은 띠와 술이 달린 상당히 정교한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것이라 약간은 신기하기도 하여 화연은 그것을 받아들어 살폈다. 표국에서 해야 할 질답에 대한 설명은 한 귀로 흘려듣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난 싫습니다. 개구리는 제가 살던 우물 물이 최고인 법입니다. 나는 다른 빛깔의 바람이며 언어, 위풍당당한 건물들 따위 하나도 궁금하지 않습니다. 이주가장의 산수와 논밭이면 족하지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그 산수와 논밭을 제대로 돌볼 생각이 도무지 없어 보이지 않느냐, 이주평은 쏟아 놓고 싶은 잔소리를 삼키며 한 마디만 더 했다.

 

 "말도 준비되어 있으니 속히 떠나 보아라."

 

 "싫다는데 왜 자꾸 권하십니까. 설마 말의 엉덩이를 때리는 것처럼 채찍을 때려 쫓아 보내기라도 할 요량입니까? 잘도 움직이겠습니다! 됐습니다, 나는 내일도, 모레도 말짱히 여기서 일어나서 여기서 잠들 것이니까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화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컥 문을 열고는 신을 질질 끌며 제 침소로 향하는 것이었다. 수도라니, 화연은 전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길을 떠나면 사서 고생이요, 한 몸 누이면 어디든 편안함은 똑같고, 사람들은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며 하인들은 저를 오래 모셔 필요한 것을 잘 아니 이 이상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지금까지 자라 온 세상 외의 것에 그녀는 호기심도 관심도 없었다. 화연은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쳇, 쓸데없는 말로 괜히 귀만 어지럽혔다. 여행에 인사가 다 무어람. 가란다고 말을 곧이들을 줄 알았다면 저들의 딸을 잘못 봐도 한참은 잘못 본 것이지. 내일은 돈이라도 한움큼 들고 나가 쓰며 기분을 풀어야겠다.'

 

 

 

 다음날 화연은 느지막이 일어나 거리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갔다. 골목 사이의 작은 전포를 지나가는데, 마침 그 앞에 매일같이 저와 어울리던 건달패들이 보였다. 화연은 소리쳤다.

 

 "거 다들 그 앞에서 뭘 하고 있는 겐가? 술값이라도 부족하여 옷을 벗어 맡기려고? 하하하! 그러지 말고 오늘은 날 따라오게. 이 누님이-"

 

 그렇게 말하는데 무리의 눈치가 이상했다. 다가오는 화연을 슬슬 피하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저들끼리 붙어 수군거리고만 있는 것이었다.

 

 "뭐야, 밤새 다들 벙어리가 되는 약이라도 먹었나? 왜 그렇게 다 주춤거리고만 서 있어."

 

 화연이 채근하자 그들은 우물쭈물하다가, 한 사람이 말을 꺼냈다.

 

 "이봐 소연小宴, 우리가 입장이 좀 곤란하네. 어젯밤에 자네 모친이 동네의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오늘부터 자네와 어울려서는 안 되리라 하였다네. 술이나 놀음은 물론이고 너무 오래 담소를 나누지도 말라고, 이를 무시한다면 이주가장에 발 붙이고 살 수 없을 것이라 했단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린가.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지금 다들 나를 놀리는 것이지?"

 

 어안이 벙벙하여 화연이 되물었다. 그러나 참으로 농담이 아닌 듯, 건달 무리들은 하나같이 찝찝하고 곤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무슨 든든한 뒷배가 있어 이렇게 지내는 것도 아닌데, 말을 거스를 수가 있어야지. 다른 협박이라면 안 듣는 척이라도 해 볼 수 있겠으나 아예 사람을 쫓아내겠다니, 별 수가 없잖는가. 소연 자네가 이해를 좀 하게."

 

 "아니 잠깐만, 도대체 언제 그런-"

 "보...볼일이 더 없을 것 같다면 우린 이만 가 보겠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 당황스럽고도 분하여 화연이 좀 더 따져 물으려 했지만, 그들은 더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지 대강 말을 둘러대며 골목 저편으로 냉큼 사라지고 말았다. 화를 낼 사람도 없어져 화연은 막막, 제풀에 발을 몇 번 굴러 보았으나 애꿎은 먼지만 날린다.

 

 배알도 없는 밴댕이 소갈머리들, 그 따위 말장난에 겁을 집어먹고 사람을 병신처럼 만들어? 화연은 허공에다 대고 욕을 한 사발 퍼붓는다. 허나 아무리 화연이라도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잡아 어울릴 수 있으랴. 다른 도리가 없으니 술이나 마시려고 주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골이 나는 만큼 오늘은 내내 말술을 퍼마시리라 생각하며 온 가게인데, 그녀는 또 문전에서부터 가로막히고 말았다.

 

 "저,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주평 대인께서 소사小士를 절대 손님으로 받지 말라고...... 만일 이주가장 내에서 어느 주점이나 객점이든 소사를 가게 안으로 들이는 곳이 있다면 올해 장사는 이만 접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고, 그렇게 단단히 으름장을 놓으셨읍지요."

 

 걸어오는 화연을 보자마자 점소이가 안으로 달려들어가 주인을 불러왔고, 그는 연신 두 손을 모아 난색을 표하며 그녀에게 사정했다. 주점은 화연의 단골집이었는데, 크지도 않은 구멍가게 같은 곳으로 술과 안주의 화려함보다는 오래 붙어앉아 있을 수 있는 분위기가 좋았다. 온갖 가게들에서 잊을 만하면 난동을 피우기 일쑤인 화연이었으나 여기서는 크게 소란을 만든 적도 없었다. 주인과 교분도 있는 편이었고 잘 알려진 가게도 아니었는데, 여기서조차 그녀를 손님으로 받지 않는다면 다른 집들은 들러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일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 허, 하고 한숨만 쉬며 돌아선 화연은, 가는 길에 대로에 있는 한 주점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일하는 아이가 지나가는 그녀를 눈치채고서는 만석에 가까운 식탁들 사이에서 남는 의자를 잽싸게 치워 버리는 것을 보고 분통이 터져 외쳤다.

 

 "안 간다, 안 가! 사람이 지나가는데 의자를 치우는 주점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구나! 몽땅 걷어다 솥에 불을 때지 그러느냐!"

 

 놀 사람도, 머물 장소도 없어지자 도무지 할 일이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무작정 길을 헤매기도 한두 시간뿐이지, 정처없이 걷고 있는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져 더 짜증을 돋울 뿐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어 화연은 집으로 돌아갔다. 망할 노친네들이 벌이고 있는 이 황당한 짓에 대해 아주 끝까지 따져 물으리라 이를 갈며, 그녀는 성큼성큼 걸음을 재촉했다. 

 

 화연이 집앞에 당도하여 보니 그 광경이 또 가히 일품이다. 아직 날이 훤하게 밝은데도 저택 삼문이 굳게 닫혀 있고, 앞에 지키는 하인의 모습조차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내려진 금제령이며 술집에서의 일까지 더해 닫힌 문을 마주하자 아주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다. 일단 문앞에 다가서서 소리를 쳐 본다.

 

 "이게 무슨 일이냐? 문을 열어라."

 

 그녀가 이렇게 찾아올 것을 알았다는 듯 사방은 조용하고 묵묵부답이다. 대문은 높다랗고 앞길에는 흙먼지만 휭휭 일었다.

 

 "문을 열래두. 비적 떼가 습격한 것도 아니고 집안에 상이 있지도 않은데 어째서 삼문을 꽁꽁 닫아거느냐? 얼른 열지 못할까?"

 

 그러나 여전히, 마치 화연이 소리를 지른 적도 없었다는 것처럼 대답하는 소리도 문이 움직이는 기척도 없다. 얼굴을 찌푸리며 화연이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마당 안에서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화가 치밀어오른 화연은 앞으로 다가가서 몇 번 문고리를 쥐어잡아 두드리다 발로 차며 악을 썼다.

 

 "아니, 세상천지에 이런 막무가내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딸을 밖으로 내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문을 닫아걸고 상점에는 금제령을 내리니, 길거리에서 굶어죽거나 얼어죽으라는 소리가 아닙니까? 입이 있다면 말이나 해 보시오!"

 

 씩씩거리며 노려보고 있는데, 문득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이 부당한 처사들에 대해 좀 따져들어 보겠거니 싶어 화연이 흥 하고 팔짱을 끼고 있는데, 사람만 겨우 드나들 정도로 빼끔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굽은 허리에 뒷짐을 진 한 사람의 노인이었다.

 

 "몇 년만에 네 모친이 나를 다시 부르기에 이주가장에 무슨 일이 있는가 하였더니, 그때 뜰을 박차고 나간 네놈이 아직도 자식노릇을 제대로 못 하고 있구나."

 

 대문 밖으로 나온 사람은 뜻밖에도, 그녀가 십칠 세 이후로는 소식도 들어 본 적 없는 옛 무공 스승인 노일환老一奐이었다. 반갑잖은 얼굴에 화연은 허, 하며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띄운다.

 

 "몇 년도 전에 떠난 사부가 예까지 무슨 일이요? 다 핥아먹은 죽사발에 고깃덩이 하나 얹어 준다니 쭐레쭐레 달려온 거요?"

 

 노일환은 한숨을 쉬며 뒷짐을 풀고 두 손을 들어올렸다.

 

 "윤 주인의 말이 이해가 가는군. 무력이 필요할 듯하여 전갈을 했다기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는데 말이야 ."

 "하?"

 "너의 모친께서 말하기를, 길을 떠나기 위해 말과 짐보따리를 받아 갈 용무가 아니라면 집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 했다."

 

 결국 이런 그림인가. 저의 앞에서 전투세를 잡고 있는 사부를 보며 화연은 저도 마주 팔을 들었다. 그래서 제자와 주먹질을 하시겠다는 것이로군. 그러나 노일환은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바라볼 뿐 움직이지는 않고 있었다.

 

 "먼저 치지는 않으시겠다? 제자에게 선공을 할 수 없다는 아직도 그럴듯한 명분이오, 아니면 선공을 허용한 것을 빌미로 원없이 때려 보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둘이 한때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다고 하나 손을 쓰는 일에 거리낌이 있을 리 없는 화연이다. 상대의 가슴팍을 향해 거침없이 일장一掌을 찔러 들어갔다. 그리고 매우 환영할 수 없게도, 그녀가 추측한 스승의 의도는 후자가 옳았다.

 

 "그리고 만일 그 용무가 아닌 일로 소란을 피운다면- 흠씬 두들겨 패 주라고 하더군."

 

 화연이 먼저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슬쩍 몸을 기울여 그를 흘리고서, 노일환은 손날을 뻗어 화연의 턱을 올려쳤다. 장을 맞은 방향대로 목이 휙 꺾여올라갔고 삽시간에 머리통 전체가 광광 울리는 듯했다. 잠깐 흔들리는 시야를 다잡고 화연은 으득 이를 물었다.

 

 "이...망할 노인네가...!"

 

 그러나 상대의 이어지는 몸짓들이 물 흐르듯 했다. 그것들은 심지어 노일환이 화연에게 가르친 적 있는, 그녀가 이미 다음 전개를 알고 있는 초식들이었는데도 화연은 그것을 다 막아낼 수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주먹에 얻어맞는 것은 배로 기분이 나빴으며, 마치 그녀의 일천한 실력을 비웃는 듯도 했다. 아니, 사부의 의도는 분명 그러할 것이다. 어떻게 해도 너는 이 권유를 맞서 상대하거나 거스를 능력이 되지 않으므로, 얌전히 시키는 대로 따르라는.

 

 애초에 저에게 무공을 가르친 스승과의 대결에 승산이 있으리라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옛 사부가 몇 마디 말을 한다고 해서 곧이듣고 머리를 숙일 리는 더욱 만무한 것이었다. 오늘 종일 당한 수모의 화풀이라도 하고 싶은 양 화연은 주먹이며 발을 마구 내질렀다. 물론 노일환은 그것들을 여유롭게 피해 가며, 옛 제자의 온몸 구석구석을 무참하게 두들겼다. 살수는 아니지만 일초일초가 죄다 아프고 거스르기 힘든 것들이었다.

 

 십여 합을 더 받아내자 그쯤에서는 몸이 온통 욱신거리거나 떨려 더는 마음을 따라 주지 않는다. 오기로 버텨 서고 있던 화연은 결국 발을 헛디뎌서는 그 자리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수도로 떠나 보게. 양친의 바람을 더 이상 거스르지 말고."

 

 노일환은 이렇게 말하고 뒷짐을 진 채 다시 저택 안으로 총총 걸어들어갔다. 그가 모습을 감추자 다시 대문은 스르륵 닫히고 빗장이 질러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바닥에 쓰러진 화연은 아직까지 얻어맞은 온 몸이 쑤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한바탕 싸움을 벌이는 탓에 가득 일어난 흙먼지가 얼굴을 뒤덮고 입안에서는 모래와 피맛이 뒤섞여 불쾌하게 버석거렸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쿨럭거리면서 화연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야단난 일이다 사부까지 도로 불러와 나를 이렇게 막는 것을 보니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다. 여기서 내가 누리고 있는 권세들이 내 것이 아닌즉, 양친이 나를 쫓아 보낼 결심을 하였다면 발 붙일 곳이 없을 것이므로, 정말로 수도로 향할 밖에 도리가 없겠다.'

 

 한참 누워 있으려니 생각이 정리된다. 그러나 앞길이 막막했다. 또, 가게들에서 문전박대당하고 집앞에서 잔뜩 두들겨맞아 쫓겨나는 모양이니, 당한 처우에도 여간 분통이 터지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정말로 길을 떠나기가 싫었다. 이주가장의 이주 화연. 그 이름이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여기는 자신의 땅이다. 그녀는 그것을 타고났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막무가내로 굴어도 좋은 곳은 이 안뿐임을 알았다. 굳이 피곤한 세상을 찾아갈 이유가 하등 없는 계산이었다. 
 

 '어떻게 해도 떠나지 않겠다고, 며칠이고 바닥에 눌러앉아 억지를 피울까? 사람이 아니 가겠다는데 수차囚車라도 태워 보내겠는가. 저들이 제법 독하게 마음을 먹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딸이 집앞에서 굶어죽도록 내버려두지는 않겠지. 천륜으로도 그러할 테고 한 지방의 대가大家로서도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곧 이런 생각도 들었다.

 

 '수도에 다녀오라고만 했지 언제까지 다녀오라는 말이 없었고, 이름 있는 가문들에 인사를 하고 오라고 했으나 그 만남에서 무엇을 얻어 와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가는 길을 둘러둘러 강호를 유람이나 하며, 실컷 경치를 즐기고 진미를 맛보며 놀아도 안될 것이 무엇이냐. 수도에는 으리으리하게 지어올린 기방도 있고 좋은 술도 넘쳐나겠지. 그래, 혹 내가 가는 어딘가든 간에 이 촌구석보다 지내기가 좋다면 아예 눌러앉아 버릴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나아졌다. 받은 여비도 두둑하겠다, 금과 은을 쓰며 내키는 대로 두루 놀러를 간다고 생각하면 못할 일도 아니라 여겨졌다. 화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되는 대로 구겨진 옷을 털고, 대문 앞으로 다가가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 아버지! 이 화연이가 두 분의 말씀을 따라 수도에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오는 그 날까지 강녕하시고, 이 이주가장에도 걱정근심이 없이 나날이 편안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소녀가 이제 멀리 떠나니, 두 분께서는 부디 제 여로의 무사함을 기원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크게 외치지 않았으나 문이 열렸다. 그녀가 소녀시절부터 타던 말과 잘 꾸려진 여행 짐이 한 보따리였다. 밥을 먹고 몸을 씻고 가라는 것을 사양하고, 옷 한 벌만 더 받아 화연은 말에 올라탔다. 한 번 재촉하자, 곧 말이 크게 내달렸다. 고삐를 잡은 채 그녀는 오직 앞만을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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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공격 패턴은 이미 파악했다! 강약약중강약약!

우아하게 생긴 건녀인데 건달새끼인 갭모에를 생각하고 만들기 시작한 화연입니다만 어째 모에는 날아가고 건달새끼만 남은 듯한 화연이로군요(...)

분명 커뮤 같은 곳에 가면 대표 어그로 캐릭터를 맡을 듯합니다. 이런 망나니라도 괜찮아...?

 

스토리에서도 예고가 되었지만 화연이의 여행은 좀 길어질 전망입니다. 부디 많은 것을 보고듣고 좀 인간이 되어야 할 텐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분간은 인성이 나아질 예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너가 싹수 노란 캐 굴리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기 때문이지요.

화연이가 여러분께 좀 무례할 수도 있습니다만, 대신 가슴이 큽니다. 그러니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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