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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과 생시의 경계가 엷어서 당신이 하도 미심쩍어하며 물으면,

우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지금이 나의 기억이요 나의 생시이니 부디 이름을 잊지 말아 주오."

 

 기유는 성년까지 시골의 본가에서 별다른 사건 없이 평범하게 자랐다. 다만 한 가지, 어릴 적부터 줄곧 온갖 복잡한 꿈들을 꾸며 깊이 잠들지 못한다. 그러나 깨어나서는 어지러운 심신 외에 기억하는 것이 없고 이로 인해 몸이 남들보다 빨리 지치고 피로해지는 편. 다행히 신체 유약함에도 특별히 큰 병을 앓은 적은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남아가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세상을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부모님의 제안에 따라 여행길에 나선다. 여행 도중, 대륙 서쪽의 깊은 계곡에서 배를 타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하는데, 그때 정신을 잃고서는 뜻밖의 장소에서 눈을 뜬다. 소나무가 미풍에 흔들리는 어느 산 속의 정자. 옆에는 머리를 매우 길게 기른 도사道士가 홀로 상을 펴 놓고 바둑판을 앞에 두고 있다.

 

 "촘촘한 윤회의 섭리에도 뜻밖의 구멍이 있었음인가, 전생의 연들이 끊어지지 않은 채 얽혀 있구나. 날마다 꿈을 꾸지?"

 

 도사가 막 깨어난 기유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물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눈앞의 도사는 누구인지 영문도 모른 채 기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끊어지지 않은 인연들이 혼을 알아보고 꿈에서 찾아오는 게다. 한 사람이 한 생을 살면서 만든 연들이 다 몰려오니, 버티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지."

 

 "공께서는 누구십니까? 혹 제가 물에 빠졌던 것을 구해 주신 분이십니까?"

 

 기유의 말에 대답은 않고 도사는 다시 한참을 그를 바라본다. 문득 바둑판에 눈을 돌리다가 복기復棋를 밀어 치워 버리고 그에게 정자 위로 올라오라 손짓한다.

 

 "전생이 이어지는 것도 연이면, 네가 예까지 오게 된 것도 섭리일 터. 너를 도와줄 테니, 그 전에 바깥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해 보거라."

 

 "저, 여기는 어디고 바깥 세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바깥 세상이 바깥 세상이지 무엇이 또 있어. 여기는 무릉武陵이다. 인간 세상과 선계의 중간에 걸친 곳이지. 시간은 매우 느리게 가거나 빠르게 가거나 하고, 시간이 의미 없이 계절은 사철이 한데 존재해 바뀌지 않는다. 나는 여기 처박혀 있어야 하는 늙은이이니, 그저 네 이야기로 지루함이나 잠시 죽여 보려 그런다."

 

 도사는 평범한 인물이 아닌 듯싶었고, 기유는 무엇이 재미있는지도 모르겠는 제 이야기를 한참 동안, 되는 대로 늘어놓는다. 도사는 별 것 아닌 부분에서도 오호, 그렇구만, 그래서 어찌되었나? 추임새를 하며 흥겹게 들어 준다. 그렇게 몇 시진이 지난 것만 같은데도 하늘은 어두워질 기미조차 없이 여러 색으로 알록달록하고, 유유자적 구름은 흘러 이곳이 평범한 인간 세상이 아님을 짐작케 했다.

 

 이윽고 마침내 도사가, 기유더러 잠시 기다리라 하고 휘적휘적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 물병에 물을 한 그릇 떠 가지고 돌아와 그에게 건넨다.

 

 "마시고 한숨 푹 자거라. 잠을 잘 수 있을 게다."

 

 도사가 주는 물을 마시고 기유는 잠에 들었는데, 전에는 이어지지 않는 어지러운 느낌의 파편들이었던 꿈 속이 이번에는 또 하나의 생시와 같이 완전하고 이치에 맞았다. 꿈에서 기유는 '과거의 인연들' 과 만나 이야기하며 맺힌 끈들을 일부 정리한다. 처음으로 어지럽지 않은 편안한 잠을 자 보다.

 

 이후 기유가 깨어나 보니 도로 그 계곡의 자신이 탔던 배 위였는데, 마지막 기억이 분명 물에 빠진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나 옷 어디에도 젖은 흔적이 없이 말끔했다. 미심쩍어 제 몸을 살피는데 품 속에 도사의 전언이 있었다.

-한번 들어왔다 나온 이상 너는 여기에 계속 발을 들일 수 있으리니, 필요할 때 찾아와도 좋다.

 

 

 

 

 도사를 만난 뒤로 기유는 한번씩 무릉의 계곡에 들러 꿈을 꾸며 과거의 끈을 정리하고, 마음의 안정을 회복해 나간다. 그러던 중 문득 떠올린 생각이 있어 도사에게 허락을 구해 보는데, 의외로 도사는 흔쾌히 승낙한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대신 매번 이 위까지 들락날락하며 귀찮게 하지 말고. 하류에서 받아 가면 충분할 게다.

 

 도사가 처음 기유에게 마시게 했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무릉에 흐르는 물이었는데, 신선의 세계에 절반을 걸친 신비한 곳의 물은 그의 꿈을 가야 할 곳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 효과를 주시한 기유는 무릉의 물을 가져다 다른 약재와 섞어 보거나, 함께 숙성시켜 보거나, 보관을 달리하거나 하며 여러 시도를 하고, 그리하여 꿈을 꾸는 데 관련된 다양한 술의 제조법을 만들어내어 기록한다.

 

 꿈의 술들은 향기와 빛깔에 따라 제각기 효능이 달라, 보고 싶은 이를 꿈 속에서 다시 볼 수 있는 사인俟人(사람을 기다리다) 원하는 장소에 가 볼 수 있는 삽정翜庭(뜰로 날아가다), 기억 속 과거의 어느 시간을 다시 꺼내 보는 회귀回歸(다시 되돌아가다),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진실처럼 생생하게 꿈꾸게 되는 상강想罡(별을 그리워하여 상상하다) 등 저마다의 이름이 있었다. 기유는 바람이 밤낮으로 잘 드나들고 볕이 좋은 서안에 술을 빚기 위한 도가都家를 지어 은몽루라 현판을 달고 세상에 꿈의 술을 팔기 시작했다.

 

 은몽루의 소문은 그 오묘한 효능으로 인하여 빠르게 세간에 퍼지고, 매우 흥성한다. 무릉의 물 이외에도 심신을 안정시키는 약재, 주술에 쓰이는 드문 재료들이 종류에 따라 들어가므로 그 가격이 웬만하지 않았으나 사방에서 요청과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 헤어진 사람이 그리워 꿈에서나마 보고 싶어하는 이들이 가장 많았고, 말 그대로 꿈처럼 편안한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 혹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꿈을 꾸게 하려는 귀족들의 음모까지. 수많은 이들이 제각각의 이유와 필요로 꿈을 의도한다.

 

 은몽루의 술을 마신다고 몸을 해치게 되지는 않는다. 부작용도 없다. 다만 오히려 그 점을 경계해야 한다. 날마다 꿈의 술을 마시고 꿈의 세상을 기다려 꿈 속을 살아도, 그 꿈을 꾸게 하는 육신은 현세에 머물러 있는 것이므로. 현실을 잊고 꿈에만 머물려 든다면 결국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동안 기유는 은몽루의 도주로서 부와 명성을 쌓으나, 26세 경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 기억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하는 것들은 그대로이지만, 더이상 새로운 사건과 사실들을 쌓아 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짧게는 세 시간, 길게는 사흘 단위로 그 동안의 기억이 사라지고 처음으로 돌아간다. 사고 이후 몇 달간은 이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워했으나, 많은 노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서서히 자신의 상태에 적응한다. 기억의 상실을 인지하고, 날마다의 일을 꼼꼼히 기록한 장부를 보며 은몽루의 일도 계속해 나가고 있다. 틈틈이 자신의 상태를 치유할 방안을 찾으러 다녀 보지만 워낙에 특이한 증상이라 아직까지 단서는 없는 듯.

 

 한 가지 따로 기술할 만한 점은, '꿈 속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잊어버리지 않는다' 는 것. 꿈 속에서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기억을 잃는 증세는 똑같지만, 해당 시간 안(3시간~사흘)의 기억이 초기화되기 전에 꿈에서 깨어나면 그 동안의 기억은 그대로 가지고 있게 되며 미래로 이어나갈 수 있다. 기유는 종종 은몽루의 술을 이용하여 꿈 속의 사람들과 재회하고 꿈 속의 장소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기억이 초기화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지속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현실에서나 꿈 속에서나 몸에 작은 주머니를 지니고 다닌다. 주머니에는 은몽루의 문양이 새겨진 작은 초록색 구슬들이 들어 있어 기억하고 싶은 인연들에게는 이 구슬을 선물한다. 내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해도 우리가 다시 만나기를 바라고 있겠으니, 재회하는 그 때에는 나에게 이것을 보여 준다면 마음으로 반가워하며 그간의 안부를 물으리라.

 

 

 

 

 사람의 말을 잘 들어 주고,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워하는 전형적인 호ㄱ...아니 호인. 성격은 유쾌하고 활달하다기보다는 부드럽고 안정적이다. 그러나 다가가기 편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관계가 깊어지는 것은 쉽지 않다. 이는 기억의 문제뿐만 아니라 본디 그가 남에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인 데서 연유한다.

 

 꿈을 꾸게 하는 술에 쓰이는 물은 무릉의 것이어야 한다.

 한번씩 그가 물을 뜨러, 안개 자욱한 계곡 사이로 홀로 노 저어 가는 모습이 목격되곤 한다.

 

 관계에 있어서 주의할 점 : 당신과의 만남이, 기유에게는 그의 꿈 속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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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자캐들의 공식 예쁜이 겸 공식 호구 겸 공식 최연장자인(!) 은기유입니다. 무려 린족 최연장자... 기유는 기엽긔유.

설정상 아마도 자캐들 가운데 가장 금을 많이 갖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연륜만큼 재산은 쌓인다는 것일까요.......

앞으로 부캐 자금 지원은 기유에게 맡겨야겠어요. 돌림판이 돌리고 싶니? 우편 보냈다.

 

기억 상실 같은 종류의 핸디캡 + 꿈을 조종하는 스토리라니 상당히 벽한 취향의 조합입니다만,

생김새와 이름만 알던 먼 예전부터 기유는 이런 느낌의 감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육십갑자로 지은 이름하며.

 

관계가 없어서 점프했지만, 꿈의 술을 개발하려는 동기로 첫사랑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최호의 제도성남장 같은 느낌의 스토리로요. 그대의 얼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건만 잊지 못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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